2011/10/28 03:15

그렇게 평생 개처럼 살아라. 생각 중


용석과 처음 만난 건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자랑같지만 난 고교 시절 공부를 꽤 잘 하는 편이었고, 그는 그저 그런 학생이었다.
옆 반의 그는 우리 반으로 자신의 친구였던 한준에게 찾아와 문제를 물었고, 그에 대한 답을 해줬던 게 첫 만남이었다.
이후, 고3때 같은 반이었지만 정규 수업 시간 외에는 따로 공부를 했던 나와 그는 친할 일이 별로 없었다.
우열반이 운영되던 사립학교에서 그와 내가 부딪히는 건, 정규 수업시간이 전부였으니까.

그와 친하게 지내기 시작했던 건, 스무살 무렵부터였다.
한준과는 농구하면서 고1때부터 친했는데, 용석과 초등학교 때부터 동창이라 한준을 만나면 곁다리로 그를 보게 됐다.
욕심이 많고 시기가 많았던 그는 언제나 냉정한 척 하던 나를 부러워했다고 말했다.
지방으로 대학을 갔던 용석은 가끔 서울에 올라와 한준과의 술자리를 만들곤 했고,
시나브로 그와 조금씩 친해지다가 그가 나와 맞은 편 아파트에 살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급격히 가까워졌었다.

한 달에 한 번 이상은 떡이 되도록 술을 먹기도 했었고, 언제부턴가 그가 당연한 내 사람처럼 느껴졌다.
아마 우리는 가장 친한 친구 중 하나였을 것이다.
내 주변의 모든 사람을 털어 우리 가족들이 가장 예뻐했던 친구는 용석이었으니까.

내가 군대에 갈 무렵 그는 편입 공부를 시작했고, (용석은 군대 면제였다. 공익도 아닌, 면제.)
휴가를 자주 나오던 나는 그와 더더욱 술자리를 자주 가지며 굳건한 관계를 이어갔다.
부유한 환경의 그는 나와는 달리 꽤 싹싹했고, 정이 많았다.
하지만 입버릇처럼 나와 같이 딱딱 관계를 정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소리를 달고 살았다.
말하는 대로 이뤄지는 게 세상살이인지, 그는 어느 정도 주변 관계를 정리하면서 편입 공부에 매진했다.
그리고 2년의 도전 끝에 성공적인 편입으로 서울 4년제에 입성했다.
그 누구보다 기뻐했던 한 사람으로, 난 그가 우리 학교에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했었다.
결과적으로 나보다 더 좋은 진학을 한 셈이 됐지만 일말의 시기도 없이 나는 기뻤다.



블로그 처음에 밝혔듯, 나는 군대에서 처음으로 남자와 사랑을 하게 됐고 그에게 그 힘든 일련의 과정을 처음 고백했었다.
정확히 게이임을 밝힌 건 아니지만, 내가 미쳐가고 있다는 사실과 헷갈려한다는 정도를 고백했다.
군대를 전역하기 직전, 마지막 휴가를 나와서 서로 술에 진창 취한 채 나는 용석에게 꽤 많은 사실을 이야기했다.

"지금, 부대에는 나를 필요로 하는 녀석이 있어. 내가 많이 아끼고 예뻐해.."

"뭔 소리냐?"

"그리고 나를 엄청 좋아해... 그 녀석이 조금 버겁긴 하지만, 지금 이렇게 나와 있어도 좀 보고 싶어.."

"야, 집어 치워. 니가 언제부터! 니 여자친구나 잘 만나~ 안보니까 그런겨!"

"많이 신경쓰이고 그렇다.. 내가 미쳐가는 것 같다.. 죽겠다... 나연이 볼 낯이 없어... 만나기가 싫어..."

"개소리 작작해라. 꺼지고 술이나 마셔."

왈왈! 내가 처음 했던 커밍아웃은 개소리였다.
더 이상 나는 그 얘기를 입밖에 내지 않았고 우리는 술을 잔뜩 마신채로 각자의 집으로 향했다.
다음 날 일어나 그에게 전날의 일을 물으니 제대로 기억을 하나도 못했었고,
그가 필름이 잘 끊긴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정말 내 커밍아웃은 무주공산이 됐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후로도 우리는 꾸준히 만나며 우정을 쌓았다.
비록 서로 멀리 이사를 가게 되고, 또 각자 취업준비니 연수니 하면서도 가끔 만나 서로에게 기운을 북돋아줬다.


지금와서 생각하면 그가 나와 멀어지기 시작한 계기는 희서와의 관계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 동안 희서의 일방적인 관계종용에 지친 나는 그녀에게 굉장히 크게 화를 낸 일이 있었고, 
그 일을 계기로 그녀와 한 일년여간 만나지 않았다.
희서와 내가 다시 만나게 된 건 한준의 배려로 서로를 속인 채 불러낸 술자리 덕이었다.
일 년만에 만난 희서와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재미있는 사실을 알게 됐다.
바로 용석이 그녀에게 집적댔다는 사실을 말이다.

아마 용석은 나와 희서가 다시 가까워진게 꽤나 불편했을 것이다.
지금 그의 여자친구는 내가 아는 누나였고, 심지어 내 생일 자리를 시작으로 처음 만났던 거니까.
하지만 나는 일말의 언급도 하지 않았다. 그에게 아무런 티를 내지 않았다.
다 알고 있지만, 모르는 척 해주는 게 맞는 거라 생각했으니까.

그렇게 유야무야 어물쩡 넘어가며 시간이 흘렀다.

이후, 올 5월쯤 용석은 내 친구에게 큰 실수를 했었고 나는 그에 대해 불같이 화를 낸 일이 있었다.
용석의 여자친구였던 혜지 누나와 친했던 내 친구 정희가 술자리에서 작은 다툼이 붙었었다.
더 쉽게 말하면 원래부터 가까웠던 그녀들 사이에 용석이 끼면서 정희는 서운함을 느꼈고 그에 대해 따져 묻자
미안함을 느낀 혜지누나는 울면서 답하던 때에 용석은 정희에게 무자비한 비난을 쏟아냈다.
애초에 정희가 병신같은 성향을 가졌으며 더 이상 자신들의 관계에 끼지 말라고. 
정희 스스로를 돌아보라고, 니가 못나서 그런거라며 욕을 섞은 채 말을 하는 용석에게 나는 미친듯이 화가 치솟았다.

"이 새끼야, 너 쳐 돌았냐? 혜지 누나만 중요하냐? 썅 이거 돌았네."

"혜지가 지금 울잖아. 근데 내가 안돌아?"

"야이 씨발새꺄. 그래도 할 말이 있고, 안 할 말이 있는 거야."

"몰라. 내가 지금 그게 보여?"

"꺼져, 이 개새끼야. 야, 가자!!"

나는 정희의 손을 붙들고 술 자리를 나왔고, 그 때까지 혜지누나는 여전히 울고 있었다.
계속 친구들에게 전화가 왔지만 나는 안들어갔고, 정희는 자기와 혜지누나가 직접 풀겠다고 해서 들여보냈다.
화가 난 채로 난 집으로 향했고 다음 날, 용석에게 전화가 왔다.

"야, 너 그러고 나가면 내가 뭐가 되냐.."

"너 씨발 남자 새끼가 뭐하는 짓거리야?! 잘 하면 정희 치겠더라?"

"야, 어제 다시 들어와서 다 풀었어.. 미안해...."

"꺼져 이 새끼야."

"미안하다고.. 언제 시간되냐?"

"아오, 씨발.. 너랑 내 사이에 못 풀 게 뭐 있겠냐.. 썅... 지금 밖이니까 나중에 자리 잡자. 이따 전화할게."

그래, 우리가 그 정도도 못 풀 사이가 아니었다.
며칠 뒤 한준과 오랜만에 셋이 만나 새벽까지 술을 퍼먹었고, 심지어 토를 할 정도로 퍼먹으며 마음을 풀었다.
그래, 나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일이 제대로 터진 건 그로부터 딱 한 달 뒤였다.
약속을 나가다 용석이와 닮은 사람이 보여서 그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그는 받지 않았다.
그리고 문자로 술에 취해 내게 헛소리들을 보냈다.

자세한 문자내용을 쓰면 신상이 다 드러날 듯 해서 포기...


이 새끼가 취해서 그랬나 싶어 전화를 했지만 그는 계속 내 전화를 피했다.
이후에 며칠이 흐르고 이상한 낌새를 느끼기 시작할 무렵, 용석은 내게 문자를 한 통 보냈었다.

<오랫동안 생각했다. 너한테 미안하지만 난 니가 싫었다. 그래서 우리 관계를 그만하기로 결심했다. 연락하지말자.>


내 칠 년을 넘긴 우정이 저 문자 한 통으로 와사삭 부숴졌다.

그것도 아침 여덟시에 받은 저 문자는 출근길의(당시 일을 하던 관계로) 내 손을 덜덜 떨게 만들었다.
용석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당연히 그는 받지 않았고, 나는 바로 문자를 보냈다.

<혼자서 북치고 장구치냐? 너 돌았냐? 미쳤냐? 씨발, 전화 안받아?>
<더 이상 싸우기도 싫고 더 이상 미안해하기도 싫다. 그동안 미안했다. 이제 우리 그만하자.>
<그만? 씨발... 인간적으로. 너 내가 친구였다 생각해서 한마디만 더 한다. 잘 살아라, 인생.>

이후 나는 용석의 번호를 바로 지웠다.
그래, 나는 니가 입버릇처럼 말했듯이 관계 정리 하나는 잘 하니까.
하지만 마음이 벌벌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며칠 간 술에 쩔어 지냈고, 도저히 이해가 안되는 그의 행동에 주변 모든 친구들도 배신감을 느꼈다.
심지어 그 착한 한준이 마저도 용석을 이해하지 못했다.

모두가 날 위로하던 때에, 희서가 나에게 다른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그럴 줄 알았어. 걔 언젠가 네 뒷통수 칠 줄 알았어."

"난 진짜 몰랐다..."

"너 몰라? 맨날 너 없으면 그냥 너 씹고 그러던 거."

"알아.. 근데 그건 그냥 노는 거지."

"아닐걸? 너 걔 나랑 어떻게든 해보려고 껄떡대고 그런 때에 뭔소리 한 지 모르지?"

"뭐라고?"

"너 남자 좋아한다는 소리도 하더라."

"...!"

"걔 진짜 너한테 좋은 애 아니였어. 어떻게 그런 개소리까지 지어내냐? 아무리 술 취해서 껄덕대고 싶어도 그렇지."

나는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했고, 계속 소주잔만 비웠다.
적어도 나는 그를 진심으로 믿었다. 심지어 내가 커밍아웃을 하게 된다면 가장 먼저 할 사람으로 생각했었다.
물론 용석이가 내 정체성을 정확히 알아서 하는 소리는 아니었을 거다.
의심받지 않도록 여자들과의 관계는 보여주기식으로 꽤 이어나가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만일 내가 진짜 그에게 제대로 된 커밍아웃을 했었다면... 나는 어떻게 됐을까.?


며칠 전 한 마디를 더 들었다.
근간 한준과는 못만났던 나는 얼마 전 통화에서 목소리가 이상함을 느꼈었고, 
아니나 다를까 한준과 용석이 만났던 이야기를 희서가 듣고 술 자리를 나왔었다.

용석과 자주 가던 술집에 갔던 터라 입버릇처럼 나도 모르게 탄식이 나왔다.
그 탄식을 보고 희서는 다시 한 번 따끔하게 내게 충고했다.

"청년! 너 그 자식 생각하지마."

"어?"

"너 지금 용석이 생각하는 거잖아."

"아... 여기 한준이랑 같이 자주 오던 데니까... 근데 그 새끼는 진짜 나한테 미안하지도 않을까..?"

"야, 청년! 너 그런 생각도 하지마. 얼마전에 한준이 만나서 들었는데, 용석이가 그랬다더라."

"...?"

"한준이한테는 미안한데, 청년이 너한테는 하나도 안미안하데. 못믿겠으면 한준이한테 물어봐."

"와.. 씨발... 진짜....."

"정말 걔는 잊어버려. 너한테 진짜 아무 도움도, 그리고 아무 미련도 안 될 놈이야. 버려!!!"

"그래... 잘 된 거 맞네, 어떻게 보면... 더 안끌어서.. 여전히 정신머리 못차렸네.. 썅..."




용석이와 보냈던 시간 모든 게 다 거지같지는 않았다.
분명히 지난 7,8년 나는 그와 즐거웠다.
우리는 여행을 같이 다니기도 했고, 사우나도 가끔씩 다녔다.
가장 싫어하는 워터파크를 끌고 가기도 하고, 고소공포증이 있던 녀석을 끌고 자이로드롭을 타서 실신시킨 적도 있었다.
그 재미있고 기쁜 시간 안에 용석이는 분명 나와 함께였다.

하지만 더 분명한 건, 더 이상 용석이와 함께 할 일은 없다는 것이다.
나는 이제 두 번 다시 그 새끼와 만나지는 않을 것이란 사실이다.



평생 그렇게 개처럼, 아니 개만도 못하게 빌빌대다가 살다 죽어라.

난 니가 부러워, 난 니가 좋아. 그렇게 입에 발린 소리 살살 하면서.
환심 얻고, 뒤로 잘 속이면서 안걸리게.


단, 네 뒷통수도 조심하면서 말이다.





덧글

  • 명품추리닝 2011/10/28 16:29 # 답글

    많이 분노하고 슬퍼하세요. 시간과 새로운 경험이 약이랍니다.
    사람에게 뒷통수 맞는 경험은 저도 해봐서 말입니다.
    저는 취미생활이 많은 편이라 그런 것으로 스트레스를 풀고 있어요.
    그러면 그냥 잊어지더군요. 제게는 더 재미있고 보람있는 일상이 있으니까요.
  • 청년 2011/10/28 20:49 #

    사실 이제 좀 지난 일이라 잊혀지곤 있어요. 다만 가끔 치솟는 분노가... 흐...

    이제 술로는 좀 그만 풀어야하는데, 술 만한 게 없네요; ㅋ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 봄날 2011/10/28 20:17 # 답글

    그런 인간들은 도대체 왜 싫어하는데 친한 척을 하는걸까요? 제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부류의 사람들이에요..
    아마 그동안 청년 님을 부러워하고 질투하면서 지냈을 지도 모르겠네요. 아 세상엔 개같은 놈들이 참 많아요.

  • 청년 2011/10/28 20:51 #

    저도 정말 이해하기 힘든 게 그거였어요.. 몇 년을 그렇게 숨기고 살았던 걸까 싶기고했고, 막상 그렇다면 그건 정말 무서운 일인 것 같기도... 후....

    사람 처럼 사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새삼 느꼈던 일이었습니다.
  • 2011/10/28 23:45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청년 2011/10/29 01:35 #

    전 죽을 때까지, 그 어떤 누구에게도 커밍아웃은 하지 않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저 일은 이런 결심에 아주 큰 계기가 된 일이죠.

    제 지난 사랑 이야기는 나중에 천천히 포스팅 한 번 할 생각이에요ㅡ 하핫.
    '이쪽도시'에서 예전에 한 번 쓴 적이 있어서 아마 본 분들도 있을지도.. 하핫

    그리고. 블로그는 쉬지 마세요. 숨 쉴 구멍은 있어야죠... :)
  • sweetbebe 2011/11/03 02:25 # 답글

    정말 곤란하셨겠어요.. 그치만 다른분들 댓글도 그렇듯이
    누구나 겪는일 같아요 걘대체왜그러나 이유를 찾아보면 그사람 환경까지 거슬러올라가되고
    그러다보면 그도 피해자일때가 많더라구요
    그저 당하지않고 해하지않도록 조심할뿐'_'
  • 청년 2011/11/03 10:47 #

    이유를 못찾겠거든요. 서운한 것도 다 풀고. 뭐 그랬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됩니다.
    적어도 친구라고 생각하면 그런 식으로 행동하면 안되는 거죠. 아니, 심지어 그저 지인일지라도. 지켜야하는 예의가 있는 건데..

    암튼. 뭐 벌 받겠지 하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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